대학사계

“어떤 교과서를 보는 것이 좋나요?” 내게 찾아오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의 하나이다. 나의 답은 간단하다. “좋은 교과서를 보는 것이 좋지.” 언짢아진 학생들이 그럼 어떤 교과서가 좋은 것이냐고 되묻는다. 속으로는 ‘그야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가 쓴 책이 제일이지.’라고 답하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 넘쳐흐르는 교과서 목록에 내 이름을 얹지 못하고 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책 중에서 어느 것이 최선인지를 정해야 하는데, 이 판단이 쉽지가 않다. 책방을 둘러보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저자의 책을 무심코 사거나 주변에서 많이 본다고 입소문이 난 책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옳은 결정이 아닐 수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과서는 싸지도 않아 여러 권을 사서 볼 수 없는 게 학생들 형편이다. 따라서 한번 선택이 잘못되면 매우 위험한 공부가 시작될 수 있다.

사실 교수로서 내 소원 중 하나가 내가 쓴 교과서로 강의를 해보는 것이다. 남들은 교재를 팔아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지만 나에게 그런 꿈은 가당치도 않다. 그저 나도 한번 내 방식대로 정리하고 편집한 교과서를 학생들 앞에 내놓고 싶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교재라 하더라도 남이 쓴 책을 내 강의 방식에 어울리게 사용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물론 내 생각을 정리한 강의노트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학생들의 편의를 생각하면 그래도 괜찮은 교과서를 하나 선정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내가 쓴 책을 교재로 삼고 다른 책들을 참고서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나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 사실 20여 년 동안 같은 과목을 가르치며 강의 경험도 쌓였고 강의록도 정리가 되어 있다. 정부를 다루는 내 분야의 경우 경제학의 핵심 전공인데다 각종 공무원 시험에 필수 과목이어서 교재 수요도 적지 않다. 주변에서도 왜 여태 교과서를 내지 않고 있느냐고 다그친다. 그런데 나는 왜 책을 쓰지 못하는 걸까.

핑계를 대자면 한이 없지만 내가 선뜻 교과서를 쓰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논문은 쓰는데 책을 못 쓸 이유가 없을 것 같지만 그게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논문이야 내가 오랫동안 집중해오던 분야에서 주제를 잡기 때문에 수준은 좀 낮더라도 능력껏 쓰면 되지만 교과서는 사정이 다르다. 창의적 내용보다는 이미 검증된 이론이나 사례를 다루기 때문에 조금만 부지런하면 누구나 손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교과서를 집필하려면 상당한 실력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선 방대한 이론과 사례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잘 모르면서 남이 배우는 책을 쓴다는 것은 성분이 불확실한 재료를 섞어 아이들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일단 학문적으로 어느 정도 성숙해야 교과서를 쓸 엄두를 낸다. 그렇다고 관록 있는 학자가 모두 교과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전문서와는 달리 교과서는 학생의 눈높이에 수준을 맞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교과서를 낸 저자들이 대부분 강의를 잘하기로 명성이 높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처럼 충분한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논리와 강의 경험을 엮어야 좋은 책을 낼 수 있는데 나는 이럴 준비도 용기도 아직 많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우리나라 현실을 기존 이론과 버무리는 작업이다. 다른 사회과학 분야도 비슷하지만 경제학의 주류 이론은 대부분 미국 경제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미국의 역사나 제도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론이라는 것이 추상화, 공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를 가르치고 배울 수는 있다. 하지만 이론과 현실의 연결 고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런 방식의 공부는 어렵기도 하거니와 별 쓸모가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경제학 수업은 많이 듣는데도 정작 현실 경제에 대한 식견이 부족한 것은 바로 ‘미국 이론’을 여과 없이 그대로 공부한 탓이 크다. 물론 미국에서 생산된 이론이라도 다른 나라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제도적 특수성이 강조되는 분야의 경우 외국 이론을 우리 경제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가장 이상적인 교과서는 기존의 선진국 이론을 충분히 소개하면서 우리의 제도나 경험에 부합하는 이론과 사례를 함께 다루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학생이 이 책을 읽고 기존 이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우리 현실에 대한 식견도 높아지게 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이런 교과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이론이 별로 개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례라도 우리 것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수입이론을 우리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지를 평가하는 내용도 교과서에 담아주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우리나라 현실을 소화해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내공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인지 국내 교재들 중에는 이론은 따로 정리하고 한국의 제도나 정책은 별도의 장으로 추가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책으로 공부하면 이론과 현실이 따로 놀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시험 응시생을 염두에 두고 여기저기서 적당히 발췌해 뚝딱 만들어 낸 백화점식 교재도 적지 않다. 이런 책을 택하면 이론 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어쨌거나 정말 좋은 교과서가 한 권 태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 같은 사람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학생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좋은 교과서를 추천해 주는 것이다. 우선 수업 시간에 쓰는 교재의 경우 나는 세계적으로 정평 있는 영어 원서를 택한다. 토종 교재들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는 이 방식이 내 강의 스타일에 더 잘 맞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이론의 제도적, 시대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이론과 현실 사례를 잘 매치시켜 놓은 책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비록 외국 사례를 사용하긴 했지만 수입 교과서들이 토종 교과서들보다 이런 측면에서 우월한 건 사실이다.

물론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가르치는 경제학 분야의 경우 원론에서부터 전공 과목에 이르기까지 정평 있는 외국 원서를 교재로 쓰는 비중이 매우 높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실제 강의실에서는 외국의 현실 경험을 소개한 사례들은 쏙 빼고 이론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외국 교재를 사용할 바에는 우리말로 잘 정리해 놓은 국산 교과서를 쓰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당장에야 이론 공식만 추려 가르치는 것이 교수나 학생 모두에게 편해 보이지만 멀리 보면 이는 많은 것을 놓치는 방식이다. 비록 다른 나라 경험이긴 하지만 이론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현실을 설명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사회과학 분야 강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는 경제를 이해하려고 경제학을 공부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학기 초에 교수가 지정해 준 교과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는 주저하지 말고 다른 정평 있는 책을 사는 것이 좋다. 어차피 공부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어떤 과목이건, 어떤 목적이건 가장 좋은 책이 나의 첫 책이어야 한다.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이론의 현실적 맥락을 제대로 짚어 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고시와 같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일단 좋은 책으로 기본적인 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한 다음, 혹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고시용으로 디자인한 교재를 봐야 한다. 고시생들이 많이 본다는 책들이 어쩌면 제대로 된 고시 공부를 방해하는 장애물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좋은 책을 고르는 일 못지않게 책을 잘 읽는 것도 중요하다. 수업을 들을 때는 보통 교수가 읽어야 할 부분을 지정해 주지만, 혼자 읽을 때는 나름대로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 교과서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두껍다.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면 따로 교회나 절에 다닐 필요가 없다. 그만큼 많은 인내와 수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교과서의 첫 장들은 하나같이 왜 그리 지루한지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아직 그 분야의 첫 걸음도 안 뗀 학생들에게 장황하게 뒤에 나올 이론을 미리 요약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당장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각종 제도나 사상을 연대기식으로 지루하게 서술해 놓은 것들도 있다. 좋은 책일수록 앞 장에서는 학생 눈높이에 맞는 방식으로 문제제기를 한다.

내가 혼자 책을 읽어야 하는 경우라면 너무 욕심내지 말고 반드시 읽어야 할 일차 목표 범위를 정하는 것이 좋다. 일단 이 책의 저자와 한번 맞대결을 해본다는 기분으로 덤비는 것이 좋은데 그러려면 ‘짧고 굵게’ 부딪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열 개의 장을 목표로 삼았다면 각각의 장을 확실하게 정복해 보는 것이 좋다. 한 장을 읽을 때는 대략 세 번 정도 반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첫 번째는 조금 빠르게 핵심만 건드리며 지나간다. 그리고 그 장 말미에 있는 요약을 읽어본다. 내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가능하면 정독 모드로 간다. 아주 어려운 부분은 지나칠 수 있지만 가능하면 박스에 나와있는 현실 사례도 본다. 마지막으로는 복습을 겸해 다소 빠르게 한번 더 본다. 잠시 제쳐 놓은 부분이 있다면 이때 챙겨볼 수도 있다. 그리고 피날레로 요약 부분을 깡그리 외워본다.

이상은 내가 통상 학생들에게 권하는 효과적인 교과서 읽기다. 당연히 내 사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눈여겨보면 다독과 정독이라는 표준적인 책 읽기 방식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해가는 요령이 담겨 있다. 한번에 너무 많이 읽으려 하면 힘들어 지치고, 너무 자세히 읽으려 들면 지겨워 지치는 법이다. 물론 이상의 예시를 자기 스타일에 맞게 변형할 수도 있다. 정독 부분을 두 번으로 나눌 수도 있다. 책 전체에서 핵심만 추려 일차 목표로 삼았듯, 각 장에서도 꼭 필요할 부분만 손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좋은 교수에게서 좋은 책으로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런 호사를 누리며 공부하는 학생은 전 세계에 그리 많지 않다. 흔히 하버드나 예일과 같은 명문대학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그곳 학생들도 강의에 불만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도 평균적으로는 다른 곳보다 사정이 많이 나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점은 모르겠지만 교과서는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이 쓰는 것과 같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다가 우리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토종 교과서를 함께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끔 나 스스로 내 강의를 평가해볼 때가 있는데, 부끄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우리 학생들에게 교과서만은 좋은 것들을 선택해 준 것 같아 다행이다. 그런데 내가 교재를 써서 그것으로 강의하게 되면 내 강의 평가는 더 낮아질지 모른다. 이래저래 책 쓰기는 글렀나 보다 (1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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